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6세 (문단 편집) === 유배 그리고 암살 === [[장미전쟁]] 중에는 먼 [[친척]]이었던 [[요크의 리처드]]의 아들이자 본인에게는 [[팔촌|8촌]] 동생이 되는 [[에드워드 4세]][* 동양에서만 족보를 따진다고 생각하는데, 실제 유럽 왕족들의 혈통과 촌수 구별도 그에 못지 않다. 심지어 팔촌은커녕 왕가와의 혈연이 몇 백 년 지나도 적법한 자손들이라면 [[프린스]] 칭호를 쓸 수 있는 특권이 있다. 다만, 동양은 [[유교]]의 영향으로 인해 평민들조차도 사돈의 팔촌까지 다 따지는 경향이 있던 데 반해, 서구권은 명문가나 작위 계승 문제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시시콜콜하게 따지지, 그런 거랑 아무 상관없는 평민들은 6촌을 넘어가기만 해도 친족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.]에게 밀려 잠시 런던 탑에 유폐되기도 했는데, 이때 정신착란 증세를 심하게 보였다고 전해진다. 이후 잠시 세력을 키우는 한편 에드워드 4세의 심복이었던 워릭(Warwick) 백작을 끌여들여 에드워드 4세를 밀어내고 도로 왕좌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정신착란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된 판단과 통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. 이 정신착란은 외할아버지 [[샤를 6세]]에게 물려받았다고 하기도 한다. 물론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해서 프랑스 내 영토를 거의 모조리 빼앗기고, 한때 자기를 괴롭혔던 마녀라고 생각했던 잔 다르크가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명예회복이 선포된 꼴[* 사실 프랑스가 백년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상황이어서 잔 다르크의 명예가 회복될 재판이 다시 열리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잉글랜드가 [[오스만 투르크]]의 유럽 침입을 막는 데에 지원해줬기 때문에 교황청이 잉글랜드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 그래도 설마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. 하지만 결국 끝내 그나마 믿었던 교황청이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을 열어버려서 헨리 6세와 잉글랜드는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.]도 보고,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등, 충격을 연속으로 받는 환경적 요인도 있었을 듯. 결국 다시 에드워드 4세에게 밀려 런던 탑에 유폐되었고 1471년 5월 23일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추종세력에 의하여 암살당했다. 공식적인 사인은 [[우울증]]이었으나, 1911년 발견된 헨리 6세의 유골에서 두개골은 머리카락이 피로 엉겨붙어 있어 머리를 강한 도구로 찍혀 죽어서 암살되었음이 드러났다. 여담이지만 에드워드 4세의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형제도 그들의 숙부 [[리처드 3세]]에 의해 폐위되어 런던 탑에 갇혔다가 죽음을 당했다. 참고로 부인 [[앙주의 마르그리트|앙주의 마거릿]]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[[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]]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어머니와 함께 외가인 프랑스로 망명, 1470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딸 앤 네빌과 혼인하였다. 이후 1471년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가 에드워드 4세와 맞서 싸웠으나,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. 헨리 6세가 사망하면서 랭커스터 왕조의 후계는 단절되었으며 그의 아내인 마거릿은 이때 포로가 되었지만 사촌이었던 프랑스 왕 [[루이 11세]]에 의해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가 살다 1482년에 죽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